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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라깡과 보이차
제목 자끄 라깡과 보이차
작성자 대표 관리자 (ip:)
  • 작성일 2008-11-20 01: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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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696
  • 평점 0점

자끄 라깡의 자료를 보다가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알다시피 라깡은 프랑스의 구조주의 학자이다. 그의 정신분석학은 융과 함께 프로이트 이후 가장 괄목한 성과로 알려져 있다.

 

라깡의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가 리비도와 같은 개념으로 생리적이거나 생물적인 부분에 천착했다면 그는 무의식을 구조주의적으로 해석하였다.

말하자면 철학이나 언어적으로 정신을 분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무의식이 언어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애를 썼다.

 

흔히 라깡을 욕망의 이론가라고 하는데 탈구조주의 철학자인 질 들뢰즈가 무의식을 ‘생산의 욕망’으로 바라보았는데 반해 라깡은 ‘결여의 욕망’ 개념으로 정의한다.

그의 일생은 이 욕망의 성격과 구조를 밝히는데 투신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깡에 의하면 무의식은 의식의 가장 밑에서 작동하는 욕망의 질서를 나타내고, 이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실행하는 존재를 주체로 본다.

그리고 이 주체가 대상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그 세계를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나누고 있다.

 

자, 이 지점에서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라깡의 욕망이론을 보이차를 향한 욕망과 연계시키면 딱 들어맞더란 얘기다.

 

먼저 상상계는 라깡에 의하면 ‘거울단계’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어린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그 거울 이미지에 비친대로 상상적으로 자아를 구성한다. 그러나 그렇게 구성된 자아는 주체의 진정한 본질이 아니며, 오히려 주체를 속이는 기만적인 환영이라는 것이다.

 

이제 보이차와 연관을 시켜보자.

대개 사람들은 보이차를 처음 접할 때 책이나 인터넷을 통하여 보이차의 정보를 알게되고 또 차를 구입도 하게 된다.

책의 저자나 인터넷의 필자는 자기가 아는 만큼 보이차의 세계를 상세하고도 장황하게 설명을 하게 되고 매체라는 권위에 보이차 초보자들은 그 정보들을 믿게 된다.

여러 매체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나 부분을 초보자들은 신봉하게 되고 갑자기 아는 것이 많아지니 아는 체하면서 말이 많아지게 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보이차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바로 라깡 식으로 말하면 ‘거울이미지’를 진정한 보이차(주체)로 착각하게 되는 단계이다.

 

그러나 라깡은 이것은 진정한 보이차(주체)가 아니라고 단호히 밝히고 있다.

오히려 보이차를 속이는 기만적인 환영이라는 것이다.

 

그럼 다음 단계를 보자.

다음은 상징계인데 이 상징계는 어린아이가 오이디푸스 단계를 거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 단계에서 어린아이는 아버지의 법과 권위를 내면화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진입하는 곳이 바로 상징계인 것이다.

이 상징계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이 세계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언어로 관계를 맺는 공간이다.

아버지는 이 현실세계를 대표하는 동시에 주체가 동일시하는 큰타자(大他者)이다.

아버지는 남근을 소유하였고 남근이라는 특권적 기표(시그니피앙)를 얻고자 하는 것이 바로 주체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욕망이란 남근이 없는 상태, 곧 결여를 뜻한다.

 

그럼 보이차에서는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이제 책과 여러 인터넷 매체를 통해 알게 된 지식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다른 사람의 지식이 간혹 충돌을 하게 되어 인터넷 상에서 피터지게 싸우는 일도 가끔은 생기면서 회의가 들게 된다.

그러면서 이제는 서서히 보이차를 마시는 사람들의 모임에도 참가하게 되고 보이차를 잘 안다는 사람들도 찾아보게 된다.

 

드디어 자기가 찾는 모임을 만나고, 많은 품명과 말(언어)로 보이차의 지식을 나누게 되고, 거기서 진정한 사부라고 여겨지는 보이차의 고수를 알게 되면서 그는 점점 보이차의 고수를 자신의 내면과 동일시하게 된다.

보이차의 고수는 바로 그 세계의 권위이자 법이며 큰타자인 것이다.

이 권위(남근)를 가진 고수의 권위는 주체의 욕망이며, 이 욕망은 권위(남근)의 결여에서 다시 시작하게 된다.

아! 보이차의 세계는 멀고도 험하다.

 

마지막으로 라깡은 실재계를 설명하는데, 애석하게도 라깡은 이 주체의 욕망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단언한다.

욕망은 상징계의 질서에 갇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데, 그 너머가 바로 실재계이다.

다시 말해 실재계는 욕망이 최종적으로 도달하고자하는 목표지점인데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세계란 것이다.

그 세계는 상징계가 균열을 일으킬 때 얼핏 들어날 뿐이라고 한다.

 

실재계를 비유하자면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곳이어서 주체의 원초적 현실이자 균열없는 충만한 세계이며, 안팎의 구분도 없고, 대상과 주체의 구분도 없는 원융한 세계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가 닿을 수 없고,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이 모순의 대상이 우리 욕망의 궁극적 귀착점이라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보이차에 적용해 보자.

어떡하랴, 궁극의 실재계는 더 이상 도달할 수 없다는데.

보이차 고수의 법을 모두 전수받고 이제 그 고수와 내가 내면적으로 동일화되었지만 뭔가  보이차의 세계가 더 있을 것이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리고는 자기만의 보이차 세계를 탐구하게 되는데,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차는 차일 뿐’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보이차의 진수가 어디에 있을지, 더 좋은 보이차를 가리는 경계가 무엇이지, 잘 만들고 잘 보관된 노차는 어떤 것이지, 골동차란 진정 어디까지인지 이런 의문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번민을 거듭하면서 보이차를 그냥 차로 마시는 단계에 들어간다.

밤 늦게 한 잔 차를 마시면서 깊은 묵상에 들 때, 얼핏 얼핏 세계가 열리고 나와 차가 하나라는 생각이 가끔은 들 때도 있고, 불가의 선다일여라는 말씀도 그럴 듯 하다는 생각이 날 때도 있게 된다.

 

그러나 그 충만하고 포근한 세계는 잠시 뿐이고, 정신이 들면 다시 보이차를 찾아 헤매는 순환이 계속 된다.

진정한 보이차의 세계가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하다가도 다시 멀리 사라지고 다시 차와 내가 한 몸이 되는 세계도 느껴보는 이 상징계의 세계에서 실재계로 나아가는 길은 영원히 오리무중이며 요원한 길인가 보다.

 

자끄 라깡의 글을 보다가 갑자기 보이차가 생각나서 억지로 꿰어 맞추어 보았는데 이론은 이론일 뿐이고,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조용히 차 한 잔 놓고 나를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다보면 라깡이 영원히 이루기 힘들다는 그 실재계라는 곳을 담 너머 구경이라도 할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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