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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의 맛 1
제목 보이차의 맛 1
작성자 대표 관리자 (ip:)
  • 작성일 2008-12-02 21:46:47
  • 추천 추천 하기
  • 조회수 891
  • 평점 0점

보이차의 맛에 대한 표현을 하다가 보면 참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정말이지 맛이란 주관적인 느낌인데 그 맛을 정확하게 남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임에, 결국 ‘마셔보면 안다’라고 얘기하거나 ‘깨끗하여 잡맛이 없다’라고 표현하게 됩니다.

언어의 수사는 한계가 있어서 그 수사가 화려할수록 오히려 그 진정성이 떨어진다는 동서고금의 문장가들이 얘기하는 바입니다.

그 수사의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는 표현을 얼마 전에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와인을 좋아하는 분들은 한 번씩 보았다는 아기 다다시의 ‘신의 물방울’에서 인용한 글인데,

 

“파워풀하고......그러면서 녹아내리는 듯한 단 맛과 톡 쏘는 듯한 신맛이 확 밀려오는 느낌이야. 중후한 기타와 묵직한 드럼으로 감싸는 듯한......그야말로 퀸의 보컬의 달콤하고도 허스키한 목소리를......뭐랄까 클래식 같지만 그렇지도 않아. 이건 보다 모던한 느낌. 역시 퀸이예요.”

 

하나 더 볼까요?

 

“칠흑 같은 어두움이군......이 와인에는 악마 같은 어두움이 깃들어 있어. 리히르트 스트라우스의 가곡에 맞춰 관능적으로 춤추는 살로메. 그래요 실로 이 와인은 관능 그 자체. 그것도 퇴폐가 낳는 피 냄새가 나는 관능.(중략) 오오 이 얼마나 악마적 퇴폐인가, 이 얼마나 감미로운 도취인가.”

 

어떻습니까. 저는 속이 확 뒤집히면서 구역질이 나려고 합니다. 오히려 이 글을 보면 와인은 꼴도 보기 싫어질 것 같습니다.

이 처럼 맛의 표현이든, 무엇이든 언어의 수사가 과해지면 진정성은 아주 떨어지게 됩니다.

 

한 때 한국의 젊은이에게 폭발적 인기를 얻었던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 산문인 ‘위스키 성지 여행’에서 하루키는 위스키를 마시는 순간을 이렇게 표현 합니다.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이처럼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당신은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려 넣기만 하면 된다. 너무도 심플하고, 너무도 친밀하고, 너무도 정확하다.(중략) 아주 드물게 주어지는 행복한 순간에 우리의 언어는 진짜로 위스키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적어도 나는- 늘 그러한 순간을 꿈꾸며 살아간다.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하고.”

 

맛을 표현하는 가장 그럴듯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보이차를 마실 때도 그러한 순간이 있지요. 그냥 차를 우려 주는 찻잔을 들어 가만히 입 안 가득 머금으면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아도 행복한 순간이 되지요.

 

같은 세대의 일본 작가 무라카미 류, 그의 소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젊은 날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그는 음식을 소재로 한 소설도 썼었습니다.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라는 소설집인데 그 중 ‘열한 번 성형수술한 여자’편에 보면 최고급 소갈비를 살짝 구운 로스트 프라임 리브스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합니다.

 

“웨이트가 잘라준 짙은 핑크색 살코기를 입 안으로 넣는다. 늘 그렇지만 몹시 잔혹한 짓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입 저 안쪽의 점막을 아기의 혀가 애무 하는 듯한 느낌이 들고, 배어나온 육즙이 목을 자극하여 바르르 떨리게 한다.”

 

무라카미 류는 하루키보다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맛을 표현합니다. 그의 자극적인 소설 문장답게 ‘아기의 혀가 애무하는 듯’하다는 과감한 표현은 역시 무라카미 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신문에서 여러 작가들의 작품 속에 나오는 맛에 대한 표현을 소개해 두었는데 황석영의 글도 있고(‘황석영의 맛과 추억’이란 산문집인데 관심있는 분은 일독해 보시기 바람), 사회주의자면서 생태주의자인 스콧 니어링의 아내 헬렌 니어링이 쓴 ‘소박한 밥상’도 소개해 놓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을 읽고 동감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부가 먹던 음식의 레시피가 있다고 해서 ‘소박한 밥상’도 읽어 보았는데, 단순하게 그 책의 내용을 말하면 ‘대충 먹어라’였습니다. 야채와 견과류, 과일, 곡류를 그냥 있는 그대로 먹고 삼시 세끼 채우려 하지 말고 배가 고프면 먹어라는 것이었습니다. 맛을 느끼기보다는 덜 먹고, 채식을 하고, 먹는 것에 목숨 걸지 말고 그 시간에 생산적인 여가에 투자하라고 했습니다.

 

저도 전에는 맛집을 순방하고 싶어 하는 부류였으나 니어링 부부의 책을 읽고는 그런 생각을 지웠고 그들의 말에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입이 좀 심심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진보적 생태주의자인 카를로 페트리니의 글에서 위안을 얻었습니다.

‘슬로푸드, 맛 있는 혁명’에서 그는 “생태적 감수성이 없는 미식가는 바보지만, 미식가적 감수성이 없는 생태주의자는 불쌍한 사람이다.”라며 “가난한 자도 먹는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고 음식 먹기의 즐거움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맛을 표현한 여러 사람들의 글을 보았습니다만, 앞에서도 얘기 했듯이 언어로 표현하는 맛의 한계는 분명히 있고 그 표현이 과할 때는 오히려 음식에 대한 기대가 반감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어느 편인가 하면 소박하고 단순한 가운데 먹는 즐거움을 누리는 걸 좋아합니다. 니어링 부부와 카를로 페트리니의 중간쯤에 있다고나 할까요.

 

보이차의 맛에 대해서 쓰려다가 맛을 표현하는 언어들을 소개하고 말았습니다만 이 글이 보이차의 맛을 이야기하는데 선행되어야할 이유가 있어서였습니다.

보이차의 맛에 대해 써 놓은 글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모두가 어떤 보이차 전문가라는 분이 써 놓은 책의 내용을 그대로 베껴서 옮겨 놓은 글 뿐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의 주관성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도 않을뿐더러 사람들은 차를 마시면서 자신이 느끼는 맛을 그 책의 내용과 일치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입맛은 각각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표현을 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입맛을 남의 입맛에 끼워 맞추어 보려는 노력은 진정한 차 맛을 아는 게 아닙니다. 물론 안 좋은 차를 내 입에는 맞다고 우기는 것과는 다릅니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내일을 위해 오늘은 그만 써야겠습니다. 나머지는 다음에 또 올리겠습니다. 보이차의 맛은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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